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(문단 편집) === 2월의 [[러시아 혁명]] 이후 === >황제가 없으면 대체 누가 러시아를 통치한단 말입니까? >---- >아버지의 퇴위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 [[1917년]] [[러시아 혁명]](2월 혁명)이 일어난 이후 황제와 황후, 그리고 황녀들과 황태자는 차르스코예 셀로에 연금되었다. 임시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이들을 외국으로 망명시키고 몸값이라도 뜯어낼 생각을 했으나 [[협상국]] 어느 나라도 이들을 받아주기를 꺼렸다. 당시 차르의 삽질로 [[피의 일요일 사건]]이 벌어지고 [[1차 대전]]이 길어지면서 국민들이 떼죽음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들을 받아줬다가는 반정부 운동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. 게다가 '아무리 볼셰비키라고 해도 황제 일가가 전쟁과 실정에 책임이 있을지언정 일국의 황족인 이상 [[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|설마 죽이겠느냐'는 생각도 있었다.]][* 실제로 그나마 망명에 성공한 황족들은 모두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죽은 뒤에 도망다니다가 망명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. 그나마도 남자들은 전부 자력으로 도망가고 황태후와 공주들만 받아줬다.] 이어 10월 혁명이 벌어져 [[볼셰비키]]가 집권하자 이들은 [[우랄산맥]]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. 설상가상으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알렉세이는 [[혈우병]]이 도지는 바람에 다리를 아예 못 쓰게 돼서, '''[[니콜라이 2세]]가 아들을 직접 안고 이동해야 했다'''고 하니 당시 황제 일가족이 겪은 비참함을 알 수 있다. 그러다 1918년 7월, 14번째 생일을 불과 1달쯤 앞두고 [[예카테린부르크]]에서 [[볼셰비키]] 적군에 의해 [[니콜라이 2세]]와 일가족 모두 피살당했다. 혈우병이 심해져 처형된 지하실로 갈 때도 니콜라이 2세가 안아서 옮겼고 황후는 사령관 야코프 유롭스키에게 "아픈 알렉세이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달라"고 청했다 한다. 알렉세이는 병약한 몸이었음에도 첫 번째 총격으로 부상만 입고 죽지 않아 볼셰비키들은 알렉세이의 머리에 총을 쏘아 살해했다. 다음날에는 알렉세이의 둘째 이모인 [[헤센의 엘리자베트|옐리자베타 대공비]]도 살해되었다.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둘째 언니로,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[[러시아 제국]]에 시집 와서 살고 있었다. [[니콜라이 2세]]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, 세르게이 대공[* [[니콜라이 2세]]의 숙부. [[헤센의 마리|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]]의 5남이다.]과 옐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.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[[헤센의 엘리자베트|옐리자베타 대공비]]는 자기 집을 [[수녀원]]으로 개조하고 [[수녀]]가 되어,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. 그러다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, 안타까운 죽음이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AlexeiOlgaRus.jpg]] 첫째 누나 [[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|올가]] 황녀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. 2달 후 그들은 총살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